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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2월 26일
이 글은 예전에 숙제로 냈던 독후감입니다. 책 자체가 논문 모음집이었고 게다가 교수가 써야할 내용을 미리 정해놓았기 때문에 글은 책의 요약본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책을 읽을 필요 없이 이 요약본 한방에 끝내세요. (-_-;;) 1. 도서 소개 짧은 한국의 과학사를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몇 없는 한국 과학사에 관련된 서적중 하나다. 19세기 이양선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그 시절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과학기술에 미친 굵직한 사건들에 대하여 두루 언급되어있다. 제1부에서는 개항 이후 서양 과학 수용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이 시기 한국인들이 근대 과학기술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과정을, 그리고 초보자로서 겪는 불행한 일들에 대해 조명했다. 동도서기적 태도로 나타난 반응으로 특정한 성과만 얻어내려는 의욕만 앞서고 구체적인 계획이 부족했던 현실을 볼 수 있었고, 기반이 부족한 상태에서 벌인 과학기술의 수입이 무위로 돌아가는 안타까운 사건들을 볼 수 있다. 제2부는 암울한 식민지 시대에서의 한국과학에 대한 내용이다. 일본이 세운 ‘경성고등공업고등학교’의 허위를 볼 수 있었고 석주명 개인이 어려운 시대 상황에서의 업적, 그리고 김용관이 세운 발명학회의 노력을 볼 수 있다. 제3부에서는 해방 이후 과학발전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 개발도상국 한국의 과학이 겪는 문제점들에 대하여 구성되어있다. 책의 마지막 부분인 ‘한국과학의 특성과 반성(김영식 저)’의 부분에서는 한국의 과학기술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과 문제점을 지적했다. 한국 과학사 전반에 관한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정리할 기회가 될 것이다. 2. 저자 소개 김영식(金永植) : 서울대학교 공과 대학 화학 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1970년에 석사(전공:화학), 1973년에 박사(전공 : 화학물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석사(전공:과학사), 박사(전공 : 역사학) 학위를 다시 취득하였다. 현재 서울 대학교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과학사 및 과학 철학 협동 과정 겸임 교수로 활동 중이다. '과학과 사회'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하였으며, 저서에는 『역사와 사회 속의 고학)』, 『과학 혁명론』, 『과학사』 등이 있다. 김근배(金根培): 서울대 미생물학과 졸업.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박사. 현재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 논문으로 「월북 과학기술자와 흥남공업대학의 설립」(1997) 「식민지시기 과학기술자의 성장과 제약: 인도·중국·일본과 비교해서」(1998), 저서로 『한국 근대 과학기술자의 출현』 편서로 『근현대 한국사회의 과학』(공편) 등이 있음. 3. 개화기 한국과학의 도전과 문제점 ⑴ 개화기의 과학 수용 17세기 실학자들에 의하여 발견된 서양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은 계속 되었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서양과학기술을 지적 호기심과 실용성의 측면에 보고 있었다. 조선의 연안에 이양선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1860년 북경이 유린되었다는 소식 등 높아가는 위기의식 속에서 조선의 지식층은 2가지 반응을 보였다. 한 가지는 철저하게 보수적인 ‘척사위정’의 태도와 다른 하나는 서양 문물의 선택적 수용을 바라는 ‘동도서기론’이였다. ‘동도서기론’은 ‘이이제이’의 방식을 빌려 전통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서양의 무기기술을 배워오자는 주장이다. 이런 ‘서기’의 수용의 노력 중 대표적인 사건은 청국에 기술유학생을 파견하는 ‘영선사행’이다. 하지만 그 당시 선조들은 과학기술에 무지하여 전공을 정해줄 능력이 없었고 양반 자제가 아닌 중인이나 그 이하 사회계층에서 선발하여 사회적으로 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한국 최초의 근대 기술자들은 아무 활약도 하지 못했다. 즉 이렇게 허술하게 진행된 노력을 보면 근대과학을 보는 당시의 시각은 단지 ‘서기’를 서양의 무기로 파악하여 그것만을 배워서 서양을 물리치고 ‘동도’를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본 방문 이후의 생겨난 새로운 태도는 ‘개화’라고 할 수 있다. ‘개화론’은 우리 전통적 가치에 대한 회의에서 시작되어 무기뿐 아니라 당장 쓸모가 없어 보이는 과학기술의 모든 분야와 기타 역사 철학 등 서양의 학문을 배워오기를 희망했다. 신사유람단은 영선사행과는 다르게 성공했다. 양반층 자제들로 구성되었고 방문의 목적은 단지 대강을 구경하여 한국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짐작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방문은 단지 필요성을 인식했을 뿐이고 체계적인 노력은 부족했다. 덕분에 전문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⑵한성순보와 한성주보의 근대과학 인식 한성순보와 한성주보 두 신문에서 집중적으로 쓴 과학기술에 대한 기사를 보면 근대과학 수용에 대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지구과학, 천문, 전기, 화학, 농상, 의학 등 전 분야에 걸친 과학기술에 대한 보도는 신문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시대 신문들이 가지고 있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은 1880년대의 지식층이 가진 한계를 여러 가지로 반영하고 있다. 한글만을 사용하다가 한글 사용을 중지한 한성주보를 보면 이 시기의 신문 편집에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게다가 두 신문에 보도된 과학기술의 내용은 우리 문화가 주로 중국을 통한 서양문화의 수용을 했음을 볼 수 있다. 일본을 통한 기사는 거의 없었으며 직접 서양에서 얻어온 기사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학기술 기사들은 중국의 신문 잡지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으로 미쳐 소화되지 않은 채 그냥 베껴놓는 수준을 면치 못했다. ⑶제중원의 신화와 현실 제중원은 한국에 처음 세워진 근대식 병원이다. 이 병원의 설립에는 조선정부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정부는 서양의학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마침 일어난 알렌이 민영익을 수술 한 것을 계기로 대화를 시작한 미국 선교사 측과 조선정부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병원을 세우게 되었다. 조선정부는 값싸게 미국 선교사를 의사로 이용할 수 있었고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에 포교를 위한 봉사였다. 하지만 곧 선교사들이 어느 정도의 목적을 달성하자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제중원의 운영권을 넘겨받기 위한 미국인 선교사측 에비슨의 요청은 결국 받아들여졌고 조선정부는 제중원을 포기했다. 제중원의 활약은 그리 크지 않아서 일반 인민들의 반감도 대단했고 실제 환자수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중원 학당이라는 의학교에서 양성한 인재 또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중간에 영어를 가르치는 학교로 성격이 변했다가 문을 닫아버렸다. 그나마 제중원 학당에서 길러낸 인재도 단지 의술 조수에 국한되어 기술전수가 전혀 되질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제중원은 개혁이라는 어떤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근대 병원을 갖추었다’는 구색을 맞추는 용도와 한의학으로 못 고치는 몇몇 병을 고치기 위한 실용적인 차원에 그쳤다. ⑷ 대한제국의 전기사업 우리나라에 전기는 개항 전부터 알려지기는 했으나 개항이후 정관응의 ‘이언’이나 한성순보, 한성주보 같은 곳에서 전기의 효용성에 대하여 알려지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의 전기사업이 시작되게 된 이유는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고종의 요구에 의하여 궁궐에 전등을 달게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고종의 정치적 의도와 서구 첨단설비 도입 등의 이유로 전차와 전등사업을 전개할 한성전기회사 설립이 추진되었다. 이 회사가 처음으로 전개한 사업은 전차사업이었다. 여기서 전차에 대한 그 시대의 관점은 단지 서구 첨단시설의 편리함과 실용성에 대한 관심만 있었고 전기 발전과 전차 부설, 운영에 따르는 문제점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성전기회사는 나중에 전차 사업에서 발생하는 손해를 매우기 위하여 전등 사업을 하지만 별 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한다. 외국 첨단기술로 근대화를 이루려는 생각으로 만든 기업이었지만 실용성에 대한 지나친 믿음과 기술이전이 저절로 이루어지리라는 단순한 생각이 결국은 미국인에 의한 기술독점을 방지하지 못하고 소유권이 이전되어 버렸다. 첨단 기술에 대한 환상만을 가지고 일을 추진한 것인 이런 결과를 불러왔다. ⑸ 개화기 한국과학의 도전과 문제점 종합. 17세기부터 19세기 사이 과학기술을 보는 관점은 유교적인 관점에서 해석되어 과학기술을 단지 ‘서기’로 보아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무기 기술만을 터득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필요성을 인식했을 뿐이고 체계적인 노력이 부족하여 전문화에 실패했다. 이렇게 근현대 한국의 과학기술은 전반적으로 전문화에 실패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제중원, 한성전기회사에 이르기까지도 의욕만 앞선 추진으로 과학기술을 수용할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외국의 과학기술을 배울 사람도 없었고 과학기술 교육에 대한 체계적인 노력도 전혀 없었다. 결국 서구 과학기술에 관련된 문물을 받기는 했지만 이를 전수받아 관리할 한국인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외국인의 운영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제중원, 한성전기회사 모두 소유권이 외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한성주보의 창간호 기사 ‘논학정’에서의 예언에서 학교교육이 크게 발전하지 못한다면 나라를 지키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는 말처럼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과 노력은 이에 발맞춘 교육이 필요했다. 하지만 한성주보 창간 이후 교육만이 아니라 개화 노력 전반이 지지부진한 상태로 빠져들었다. 4. 일제 지배하의 한국과학 ⑴ 경성고등공업학교의 설립과 운영 일제 식민지 시기는 서구식 교육제도가 확립되고 이를 통해 근대 과학기술이 수용, 정착되기 시작한 시간이었다. 이 기간동안 보통학교-고등보통학교(실업학교)-전문학교로 이어지는 근대적인 학제가 마련되고 초보적인 과학기술교육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일본어 보급을 주목적으로 한 보통교육과 낮은 수준의 실업교육에 중점을 두었던 일본의 식민지 교육방침으로 인해 과학기술교육은 내용이나 수준면에서 부실한 편이었다. 일제는 식민지 지배를 확립하기 위한 여러 가지 사업에 종사할 막대한 하급기능인력을 필요로 했다. 이런 교육방침 가운데 1016년 일제는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설립한다. 이 학교는 일제가 실시하고자 했던 공업전문교육의 실상을 가장 잘 보여준다. 공업전문학교의 설립은 조선의 공업기술교육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확대 성장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인의 입학이 크게 제한되었고, 취업률이 높은 과에는 아주 적은 수를 배당했다. 게다가 조선인 졸업자의 숫자도 적었으며, 동시에 졸업 후에 얻는 기수 자격에 비해서 연구소나 정부관청에서는 일하지 못했고 단지 사립중등학교 교원이나 지방 산업기수 등의 주변적인 직책에 머물러있어야 했다. 이는 일제가 조선의 식민지공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조선에서의 기술자 양성을 위한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거나 투자를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경성고등공업학교는 일제가 형식적으로 조선에서 전문교육을 실시한다는 대의명분을 확보하고, 실질적으로는 식민지 지배에 필요한 소수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즉 식민지 통치를 원활히 해나가기 위한 목적이 작용하였다. 특히 전쟁의 전후하여 변화한 학과의 변화와 학생, 교수 수의 변화를 살펴보면 경성고등공업학교가 조선인 인력양성 또는 조선의 산업기술 개발을 위한 교육기관이라기보다 일본제국주의의 유지와 확장에 일조한 일본인 중심의 전문기술인력 양성기관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⑵ 석주명의 나비 연구와 ‘조선적 생물학’ 1923년 결성된 조선박물학괴는 높은 수준의 실험장비나 전문지식이 없더라도 연구가 가능했던 박물학이라는 분야의 특성 때문에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좁게는 생물학 분야가 이 시기의 조선의 과학연구를 대표하는 분야가 되었다. 조선인 생물학자중에서는 나비분류학을 주로 연구했던 석주명을 대표적 인물로 꼽을 수 있다. 1930년대 초 조선산 나비에 대해서는 이미 50여년의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조선산 나비에 대한 채집 및 연구가 이루어진 상태였으나 1930년 중반부터는 석주명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나비를 연구주제로 선택한 석주명은 작업을 해나가면서 도감에 실린 내용과 자신이 채집한 결과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가 보기에 이는 같은 종의 다양한 개체변이에 해당하는 표본들을 학자들이 신종으로 보고한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판단으로 석주명은 개체변이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개체변이의 범위를 보일 수 있는 정량적인 형질을 도표화 하는 방법론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이후 석주명은 동종 이명의 제거를 주된 과제로 삼아 한국산 나비의 동종이명 921개중 844개의 학명을 정리하였다. 석주명은 이와 함께 국학자들의 교류와 자신의 나비 연구를 결합하여 우리말 이름이 없는 나비 이름을 짓는 등 ‘조선적 생물학’을 이룩했다. 일제시기에 조선에서 행해진 생물학 연구는 일본인 학자들이 주도하고 있었으나, 나비분류학 분야에 관한 한 1930년대 초부터 발표된 중요한 연구성과는 대부분 석주명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⑶ 김용관의 발명학회와 과학운동 발명학회는 1922년 말 김용관이 경성고등공업학교의 동문과 뜻을 모아 발명학회를 설립했다. 발명학회는 그 설립 목적과 사업계획을 보면 과학대중화운동과는 거리가 먼 단체였다. 학회의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보면 민족공업의 진흥을 위한 단체였다. 하지만 창립 6개월 만에 회원들의 무성의함과 사회적 여건 때문에 학회는 정회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 김용관 개인적인 노력과 사회적인 여건의 변화로 발명학회는 호조를 보였다. 이후 학회의 업무가 증가하여 이사로서 이름만 걸어두던 박길룡, 현득영이 직접 참여하고 변호사 이인이 발명학회의 전담 변리사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후 대규모의 인사영입과 함께 활동방향과 이념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새 인사들은 당시 계몽적 문화운동의 흐름에 있던 ‘과학지식의 보급’을 주장했고 김용관등의 간부들은 이를 수용하여 학회의 중요목표로 설정하였다. 이처럼 원래 발명학회 간부들이 가지고 있던 것과는 다른 이념과 노선이 유입되어 이후 과학운동의 중심노선과 이화학연구기관의 설립방향에 대한 견해도 다양해져서 김용관 등은 서로 다른 견해를 조정하고 그 가운데에서 합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일로 인하여 김용관이 설립하고자 했던 발명기관인 이화학기관은 설립되지 못하였고 대신 과학보급기관을 만들게 된다. 처음에는 큰 호응을 받아 활발한 활동을 벌이지만 1936년 이후 점차 쇠퇴하여 총독부의 영향으로 점차 일본의 군국주의에 협조하는 방향으로 보급회를 변화시켜나갔다. 김용관 등의 과학운동은 조선민족의 과학화와 근대화를 염원했던 민족주의적 열정이 있었던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하지만 이런 과학기술관은 1938년 이후부터 군국주의적 사회분위기 속에서 이전의 민족주의적 열정과 분리되어, 친일적 정치이념과 그에 봉사하는 발명진흥관에 결합되었다. 이는 그들이 가졌던 민족주의 이념 자체가 민족의 현실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생각된다. 5. 해방 후부터 현재까지의 한국과학 ⑴ 원자력기구 출현과정과 그 배경 1959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연구개발을 담당할 정부기구로서 원자력원이 설립되었다. 1989년 한국에는 9기의 원자로 가동중이며 당시 전력생산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 이처럼 원자력원의 설립은 한국의 기초과학, 응용과학은 물론 산업의 발전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원자력발전소 9기중 6기는 미국 회사에 의해 발주, 건설되었다. 이는 당시 미국의 국제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미국은 국제원자력기구의 설립을 주도하고 우호국들과의 원자력 협정으로 소련의 입지를 약화시키려 하였다. 한국이 원자력협정을 맺고 원자력기구를 설립하는 과정은 원자력협정에 내포된 미국의 의도에 대한 인식부족과 취약한 국내 기반으로 말미암아 원자력사업의 성공이 거의 모든 분야의 후진성을 해결해줄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 속에서 진행되었다. 때문에 협정의 조항이 한국측에 상당히 불리한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받아들여버렸다. 이 때문에 많은 인력이 낭비되는 등 많은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원자력연구소의 설립을 계기로 마침내 과학연구기관, 연구지원 등이 모색되고 등장하였다. ⑵ 한국과학의 특성과 반영 한국은 2000년 이상의 매우 길고 연속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현재와 같은 형태의 과학기술이 한국사회에 존재하게 된 것은 상당히 최근의 일이다. 근본적으로 서양에서 유래한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이루어진 형태인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서양 과학기술을 받아들인 것은 서양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아니라 처음에는 중국 나중에는 일본을 매개로 하는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서였다. 이런 간접성은 일본 통치기간 그 이후 얼마동안 계속되었다. 서양 과학기술의 수용과 동화과정에서의 타국과의 상대적 실패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노력을 과학기술에 최우선 순위를 부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인식은 여러 부작용도 있었다. ‘동도서기론’은 동아시아 세 나라에 공통적으로 나타났으나 한국에서 가장 깊고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이런 가치관은 과학기술이 순전히 실용적인 목적으로만 존재한다는 공리주의적인 과학기술관을 불러왔다. 이런 결과로 과학기술은 한국 문화 전반에 동화되지 못했고 단순히 외래의 것이라는 것으로 평가되어 다른 영역과 유리되어있다. 잘 드러나는 예로 모든 학문분야를 문과와 이과로 나누는 관습을 들 수 있다. 덕분에 한국은 서양 과학기술을 모방하고 이용하는 데 주력했을 뿐 창조적인 기여는 거의 없었다. 한국 과학기술의 특성 중 또 다른 것으로 과학 지식과 기술의 연결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개발도상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연구를 지원하여 결과를 기다리는 것은 엄청난 비용이 들지만 바로 최종산물을 수입하는 것은 매우 간단하기 때문이다. 이는 공리주의적 가치관도 영향이 있다. 과학기술을 실용적인 도구로만 보고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관점에서는 문화적 창조력이나 독창성 같은 것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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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너무 아쉽습니다.
by 시노조스 at 08/16 오늘 보고 압도당했습니다. 다만 슬펐.. by 취월백랑翠月白狼 at 08/16 쿼드도 아이템 이라능! 스피드도 아이템.. by 시노조스 at 08/13 쿼드 데미지 먹는 시노 짱난다 by Machine at 08/13 오오 퀘삼고수 김시노님 by ToGGie at 08/13 전쟁이죠 전쟁-_-; by 취월백랑翠月白狼 at 08/09 ㅠㅠ by 시노조스 at 08/06 명복을 빕니당. by 한쓰 at 08/05 ㅇ_ㅇ 힘들군요. by 무곡 at 08/05 던전 렉이 심해서 저것까지만 했고요. .. by 시노조스 at 08/02 |